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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부석사[浮石寺]]

서평택 2009. 11. 18. 14:15

경상북도 영주의 부석사(浮石寺)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이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조사당(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 등 국보와 삼층석탑(보물 제 249호), 북지리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부석사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등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특히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한 무량수전(無量壽殿)은 부석사의 본전(本殿)으로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곳에는 국보 제45호인 소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는데,

무량수전의 건물이 남향(南向)인데 비해 이 불상만 동향(東向)인 점이 특이하다



○ 국보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국보 제17호)

부석사 무량수전 (국보 제18호)

부석사 조사당 (국보 제19호)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국보 제45호)

부석사조사당 벽화 (국보 제46호)


○ 보물

영주북지리석조여래좌상 (보물 제220호)

부석사 삼층석탑 (보물 제249호)

부석사 당간지주 (보물 제255호)

부석사 고려각판 (보물 제735호)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고려시대 대표적인 목조건축물의 양식인 주심포계 양식을 사용해서 건물이 아주 간결하고 안정감 있어 보인다. 주심포계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양식이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무를 때 쓴 글씨라 전한다

부석사 무량수전 편액. 목재로 만든 편액이지만 중국 건물들의 편액과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팔작지붕. 흔히 볼 수 있는 조선시대 팔작지붕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을 대표하는 건축양식인 배흘림 기둥. 가운데는 굵고 아래와 위는 가늘게 만들어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다. 문창살에는 장식을 하지 않아 건물 전체가 안정감있고, 간결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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