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택 2018. 6. 27. 14:31
경주로의 여행...

2005년 8월 5일(금요일)연가를 내고 아홉시경에 마누라랑,아이들이랑 태우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1박 2일의 여행을 떠나자는 지인들과의 약속이 있었지만 6,7일 휴무일에 가족과의 이전 약속 때문에 온갖 욕을 감내하며 지인들과의 약속을 취소하고 말았다.

8월 5일.. 그 언젠가 학교수학여행때 기억과 경부고속도로상에서만 보았던 경주의 관문에 들어서니  역사의 고장다운 풍경과 천삼백년전의 신라인의 정취가 풍기는 느낌을 안고 먼저,경주시 인왕동 반월성 동쪽에 위치한 국립경주박물관을 방문하였다.
천년 신라의 문화를 한눈에 살펴보고, 대릉,계림,첨성대를 관람하면서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한 회한과 현재를 생각해본다....!!!

신라인의 섬세함과 찬란했던 천년 고도 경주는 현재 우리의 동서남북 분열의 모습을 재연하는 듯하여 입맛이 씁쓸하다.
아직도 우리는 솔로몬의 지혜를 가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고, 세례요한과 같은 미래를 준비하는 정치지도자를 원하고 있지만 이곳저곳에서도 천년고도 이땅에서 조차 찾을길이 없음에 안타깝기만한 마음을 뒤로하고...
첨성대 앞 구래쌈밥집에 들러 저녁을 먹고 보문단지내 한국콘도에서 하루를 마쳤다.

8월 6일..
일어나보니 보문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천년후의 집앞 평택호를 생각해봤다.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평택의 모습을......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토암불국사를 갔다.
사찰의 정교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음에 가슴뿌듯하고 신라인 김대성의 깊은 불심을 느껴본다.
토암산에 올라 세계문화유산의 자랑스러움을 느껴보면서 언제가 될는지는 모르지만  후일을 약속하고 경주를 뒤로하고 감포로 갔다.
오늘은 아이들하고 텐트를 치기로 약속을 했는데 장소가 마땅치를 않아 포항,영일,울진을 거쳐 왕피천 불용계곡으로 가는중에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일정을 바꾸어 영주로 발길을 돌렸다 이 길은 신혼여행길이었다.
그때와 지금 변한 것이 별로 없다. 천둥번개가 친다.
소백산자락을 뒤로 하고 단양.수안보을 거쳐 충주로 장호원,안성을 지나 집으로 왔다...
이번 여행길은 날씨가 도와주지를 않았다...


신라천년의 축소판






경주시 인왕동 반월성 동쪽에 위치한 국립경주박물관은 천년 신라의 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으로 성덕대왕신종을 비롯한 10만여 점의 유물을소장하고 3000여 점의 유물을 상설 전시 하고 있다.
* 관람시간 : 09:00 ~ 18:00
* 휴관 : 매주 월요일
* 전화 : (054)772-5193
* 홈페이지 : gyeongju.museum.go.kr



토기




삼국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한 높이 23.2㎝, 폭 14.7㎝, 밑 지름 9.2㎝의 인물형 토기이다.



은제합,은제완,금제완




3종류의 용기류로서 북쪽 무덤에서 발견된 것으로 은제합은 높이 8㎝, 아가리 지름 10㎝이고, 은제완은 높이 5.5㎝, 아가리 지름 10.5㎝이고, 금제완은 높이 4.5㎝, 아가리 지름 11㎝이다.



성덕대왕신종


    

국보 제29, 지정일 : 1934.08.29 ,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시 대 : 통일신라시대


 *연혁(유래)
韓國最大(한국근대)巨鐘(거종)으로 一名(일명) 奉德寺鐘(봉덕사종) 또는 에밀레()으로도 불리우고 있다.

鐘身(종신) 上下(상하)에는 肩帶(견대)口帶(구대)를 두고 각각 寶相唐草紋(보상당초문)彫飾(조식)하고, 鐘口(종구)八稜形(팔능형)을 이루어 () ()따라 蓮花紋(연화문)配置(배치)하고 있다.

그리고 頂部(정부)에는 ()유와 音筒(음통)이 있어 韓國鐘(한국종)特色(특색)을 갖추고 있으며, 肩帶(견대)밑은 乳廓(유곽)이 네 곳에 놓이고 蓮花(연화)陽鑄(양주)九乳(구유)가 있다.

鐘身(종신)에는 공간을 두고 撞座(당좌)二軀(이구)씩 맞대고 있는 四軀(사구)飛天(비천), 그리고 一千餘字(일천여자)長文(장문)陽鑄(양주)鐘銘(종명)陽刻(양각)되어 있다.

鐘銘(종명)에는 신라경덕왕이 父王(부왕) 聖德王(성덕왕)을 위하여 ()12()을 들여 鑄成(주성)하려 하였으나 完成(완성)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심에 다음 惠恭王(혜공왕)父王(부왕)의 뜻을 이어 同王(동왕) 7(西紀(서기) 771)完成(완성)했다는 內容(내용)이다.

文獻 : 三國史記 卷十 新羅本記 第十 元聖王
三國遺事 卷三 <塔像第四>
東京通志 七卷 <佛寺 奉德寺址>
東京雜記 卷之 一 <宮室鐘閣>
東京雜記 二卷 <古蹟>
東國輿地勝覽 二一卷 <慶州府 古蹟>
문헌 : 삼국사기 10권 신라본기 제10 원성왕
삼국유사 3탑상제4
동경통지 7불사 봉덕사지
동경잡기 권지궁실종각
동경잡기 2고적
동국여지승람 21경주부 고적



       

불국사는 토함산 기슭에 있는 사찰로써 대한북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다.

이 절은 751년 경덕왕 10년에 김대성(金大成)의 발원으로 창건되었다.

三國遺事에는 김대성의 발원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있다.

 "원래 김대성은 가난한 집 아들이였다.

그러나 부처님께 시주하고 지극히 공양하여 죽은 후 다시 김문량(金文亮)이라는 재상의 집에 태어나게 되었다.

그후 이승의 부모님을 위해서는 불국사(佛國寺)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님을 위해서는 석불사(石佛寺)를 세워 표훈(表訓)과 신림(神琳) 두 스님을 청하여 머무르게 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 절은 75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774년 혜공왕 1012월인 김대성이 죽을 당시까지도 공사의 완결을 보지 못했다.

김대성이 죽은 후 국가에서 이를 완성시켰다.

따라서 이 절은 김대성 개인의 원찰(願刹)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원찰로 건립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김대성이 중창한 뒤 임진왜란 전까지 불국사는 9차례에 걸쳐 중창 및 중수를 거쳤다.

진성여왕 1(887)과 고려 현종 15(1024)에는 중수를 하였고, 1172년 고려 명종 2년에는 비로전과 극락전의 기와를 새로 이었으며, 고려 충선왕 4(1312)에도 한차례 중수를 가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세조 18(1436)에 대웅전과 관음전, 자하문을 중수하였고, 성종 1(1470)에는 관음전을 1490년에는 대웅전과 각 전각을 중수하였으며, 1514년 중종 9년에는 극락전의 벽화를, 명종 19(1470)에는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이렇게 통일신라 8세기에 김대성이 초창하여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그 사격을 잘 유지해 오다가 선조 25(1592)에 왜구가 동해안으로 침입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왜병 수십명이 불국사에 와서 불상과 건물, 석조물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다가 좌병사가 지장전 벽사이에 숨겨놓은 무기를 발견하고는 이 절을 불태워 버렸다.

그때 난을 피해 장수사(長壽寺)에 와있던 담화가 문도를 이끌고 불국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대웅전·극락전·자하문 기타 2천여 칸의 건물들은 모두 불타버리고 금동불상과 옥으로 만든 물건, 석교와 석탑만이 간신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 타버린 목조건물들은 20년이 지난 뒤에서야 점차 복구가 되기 시작했는데, 처음으로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이 해안에 의해 복원되었고, 광해군 4(1612)에는 경루와 범종각, 남행랑 등이 복구되었다.

인조 8(1630)에는 태호(泰湖)가 자하문을 중수하였고, 1948년에는 해정(海淨)이 무설전을 복구하였다.

또 효종 10(1659)에는 천심이 경주 부윤의 시주를 얻어 중건사업을 가졌다.

이밖에 안양문·극락전·비로전·관음전·나한전·시왕전·조사전 등만이 이때에 중건되었고, 나머지는 복원되지 못했다.

19691973년 불국사는 또 한차례 대대적인 중수를 가지게 되었다.

19702월에 공사를 착공하기 시작하여 당시까지 유지로만 남아있던 무설전·관음전·비로전·경루·회랑 등은 이때 완전히 복원되었고, 대웅전·극락전·범영루·자하문 등은 새롭게 단정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이 절은 신라인이 생각하던 불국토의 이상적인 세계를 건축적인 조형물로써 옮겨 놓은 것이다.

흔히들 불국사를 만다라의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華嚴經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 세계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국사는 크게 석단에 의해 양분되어 있는데 석단의 위 부분은 부처님이 계시는 불국의 세계이고 아래부분은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사바세계를 나타  내고 있다.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청운교와 백운교, 극락전을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연화교와 칠보교, 이 두 석단은 불국세계의 높이를 상징하기도 하고 동시에 그 세계의 반석같이 굳건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특히 청운교와 백운교는 33계단으로 되어 있어 33천을 상징하는 것으로 수도하는 자들이 고난을 겪으면서 결국 부처의 세계에 오르게 되는 다리를 상징한다.

중요한 유물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遮那佛坐像)



비로전에 봉안된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상이며 높이 177cm에 이르는 좌상이다.
통일신라시대 대표적인 금동불로 알려져 있으며 광배는 현재 없어지고 불신만 남아있다.
수인은 오른손이 아래, 왼손이 위로 올라간 지권인을 하고 있으며 이는 일반적인 지권인의 반대의 모습이다.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신체에 얇게 밀착되어 있어 신체의 굴곡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석가탑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에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석탑 가운데 서쪽 편에 서 있는 탑이며 높이 10.4m이다.

이 탑을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아사달과 아사녀의 설화중에 불국사 연못에 석가탑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는 구절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석가탑과 다보탑은 法華經에 나오는 '일체중생을 모아놓고 석가여래(釋迦如來)가 설법을하니 땅에서 다보여래(多寶如來)가 탑과 함께 솟아나와 이를 증명하고 둘이 나란히 앉았다.'見寶塔品의 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다보탑은 다보여래상주증명(多寶如來常住證明)의 탑이요, 석가탑은 곧 석가여래상주설법(釋迦如來常住說法)의 탑이다.

석가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우고 상륜부를 올린 통일신라시대 일반적인 형식을 지닌 전형석탑이다.

탑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연꽃을 조각한 탑구(塔區)가 있는데, 이것을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라 한다.

이것은 탑의 정역(淨域)을 구별한 것으로, 연꽃 1송이에 1보살씩 8보살의 자리라고도 하고, 석탑에 직접 조각하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의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팔방금강좌는 특별한 착상인 동시에 탑의 장엄을 한층 더하여 주고 있어 희귀한 유구로 주목되고 있다.

석가탑은 석탑 전체에 아무런 조각이 없이 간결하고 소박하며, 각 부분의 비례가 안정적이면서도 우아하고 군형미 있어 목조탑파의 형식을 답습하였던 신라초기의 석탑들과는 달리 완전히 신라식 석탑의 전형양식을 완성한 통일신라기 석탑의 태표격이다.

19669월에 도굴범에 의해 석탑이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같은해 10월에 석탑을 해체 복원·수리하게 되었다.

해체수리과정에서 2층 옥신에서 사리(舍利)를 비롯한 사리용기와 각종 장엄구(莊嚴具)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발견되었다.

특히 이 다라니경은 당나라의 측천무후자(測天武后字)가 사용된 목판인쇄물로써 학계에 커다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석가탑 사리공 내에서 발견된 유물로는 청동비천상(靑銅飛天像). 동경, 소형 목탑, 비취곡옥, 구슬, 향목 등과 계란형의은제 이중사리함(외합 높이/ 11.5cm, 지름/ 5cm), 금동 방형사리합(크기/ 6×3.3×5.5cm), 은제 사리내합(내합 높이/ 6.5cm 지름/ 5cm), 향목제 사리소병, 은제소합,무구정광대다라니경등이 있다.

이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너비 8cm, 전체길이 약 600cm의 두루마리로 된 다라니경권으로써 지질, 자체(字體)등으로 보아 8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특히 측천무후자(측천무후 연간에만 사용되었던 글자)가 혼재되어 있어 제작연대를 추정하는데 결정적인 근거가 되고있었으며 세계최고의 목판인쇄물이다.


다보탑




통일신라 이형석탑을 대표하는 석탑으로 높이는 10.4m에 이른다.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의 석가탑과 마주보고 있으며 두탑 중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탑이다.

상징적으로 볼 때 다보탑은 '법신불인 다보여래와 보신불인 석가여래가 결코 둘이 아니다(不二)' 라는 것을 상징하는 탑이다.

다보불탑 또는 칠보탑이라고도 부르며 이 탑 역시 法華經'見寶塔品'에 근거한 탑이다.

석가여래가 설하는 바로 앞에 칠보로 장엄한 탑이 땅 위로 우뚝 솟아 나왔다고 하는데 견보탑품에는 다보탑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높이는 500유순(인도의 거리를 재는 단위로 약 40리가 되며 의미적으로는 전륜성왕이 하루동안 마차로 가는 거리)이요, 평면의 넓이는 250유순이나 되었고 땅에서 솟아나 공중에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가지가지 보물로 장식된 난순(난간의 기둥과 난간 옆을 가로지르는 부재)5천이요, 감실이 천만이요, 옆으로 나부끼는 깃발, 길게 늘인 깃발, 그리고 줄줄이 늘어뜨린 구슬들, 또 보배로운 방울이 무수히 걸려 화려하고 사면으로 아름다운 향이 풍겨나와 사계에 가득 찼으며, ··유리 등 칠보로 된 지붕은 사천왕 궁전까지 닿아 있었다.

하늘나라에서는 둥근 꽃을 비오듯 뿌려 탑을 공양하였고, 천상계의 많은 신중들이 꽃··구슬·음악으로 이 탑을 향해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爾時佛前有七寶塔高五百由旬縱廣二百五十由旬從地踊出住在空中種種寶物而莊校之五千欄楯龕室千萬無數幢幡以爲嚴飾垂寶瓔珞寶鈴萬億而懸其上四面皆出多摩羅跋  檀之香充遍世界其諸幡蓋以金銀琉璃車 馬腦眞珠  七寶合成高至四天王宮三十三天雨天曼陀羅華供養寶塔餘諸天龍夜叉乾 婆阿修羅迦樓羅緊那羅摩[*]羅伽人非人等千萬億衆以一切華香瓔珞幡蓋伎樂供養寶塔恭敬尊重讚歎. 下略..)"

이처럼 다보탑은 경전에 나오는 견보탑품의 다보탑을 조형으로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다보탑의 형태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칠보는 부처의 본질인 '깨달음'의 일곱가지 덕성, 즉 칠각지를 표시한 것이고, 탑의 높이가 500유순이라 한 것은 인과 종적인 관계가 깊음을 표시하며, 평면의 넓이가 250유순이라고 한 것은 밑으로 그 덕이 널리 이웃에 미침을 표시한 것이다.

난순은 무궁무진한 정신의 힘을 간직함을 상징하였으며 비어있는 감실은 한량없는 공()의 집, 아무런 집착도 없이 자비롭기만 한 마음을 상징하고 있다.

다보탑은 法華經신앙과 함께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미쳐 많은 다보탑들이 조형 되고 그림으로 그려졌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불국사에 있는 다보탑인 것이다.

이 탑은 1925년경 일본인들에 의해 전면 해체·보수된 바 있으나 이에 관한 보고서는 물론 일체의 기록조차 남겨놓지 않아 탑속에 안치되었던 사리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복원해체를 감독하였던 감독관의 이름과 금동불상 2구를 국립경주박물관에 인계한다는 내용의 인계서가 남아 있을 뿐이며, 인계된 불상은 행방불명된 상태이다.

또한 다보탑에는 사방의 보계가 마련되어 있고 갑석 위에 네 마리의 석사자가 안치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언제인지 모르게 없어지고, 세 마리만이 있었음을 1902년에 현지조사를 실시한 일본인 학자가 확인하고 있으나 그 중 두 마리는 다시 현재는 하나만 남아 있다.

 


불국사 청운교,백운교




국보 제23, 지정일 : 1934-08-27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15-1,
시 대 : 통일신라시대


佛國寺(불국사) 前面(전면) 大石壇(대석단) 東側(동측)에 위치하여 石梯(석제)2개소에 가설하고 있는데 밑의 것이 靑雲橋(청운교)이고 위의 것이 白雲橋(백운교)이다.

靑雲橋(청운교)18()인데 登桁(등항)으로 좌우가 구분되고 있으며 登桁(등항)의 중앙에는 稜線(능선)이 있고 左右端(좌우단)에는 欄干(난간)의 흔적이 보이고 있으나 지금은 上下(상하)石柱(석주)殘存(잔재)하고 있다.

 橋下(교하)穹隆形(궁륭형)으로 通行(통행)이 가능하며 上部(상부)兩端(양단)에는 甲石(갑석)이 있어 隅角(우각)反轉手法(반전수법)石塔(석탑)蓋石(개석) 모양을 닮고 있다.
白雲橋(백운교)16단으로 靑雲橋(청운교)와 같은 樣式(양식)이나 規模(규모)가 작을 뿐이다. 橋下(교하)에는 작은 穹隆形通路(궁륭형통로)가 마련되어 있으며 甲石(갑석)手法(수법)靑雲橋(청운교)同一(동일)하다.

白雲橋(백운교)를 올라 紫霞門(자하문)을 지나면 兩塔(양탑)이 있고 大雄殿(대웅전)에 이르게 된다.

石梯(석제)의 건립도 新羅景德王代(신라경덕왕대) 金大城(김대성)創建(창건) 當時(당시)의 것으로 推定(추정)된다.


* 연혁(유래)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에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속세와 다리 위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두 계단 중 아래의 것은 17단의 청운교(靑雲橋)로 높이 3.82m, 너비 5.14m이며, 위의 것은 16단의 백운교(白雲橋)로 높이 3.15m, 너비 5.09m이다.
전체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이라는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서른세 가지의 단계를 의미한다.
청운교(靑雲橋)는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는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인생을 상징한다.
백운교 다리 아래에 작은 통로가 있고, 그 양쪽에 길게 옆으로 뻗은 청운교와 제작 수법이 비슷한 얇고 넓은 덮개돌이 있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만들었으며 다듬은 수법도 정교하다.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10(750)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신라시대의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어 매우 귀중하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 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볼 수 있는 반원아치 모양을 한 홍예교(虹霓橋)의 초기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불국사 연화교·칠보교



국보 제22,분 류 : 건축물 , 지정일 : 1934-08-27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15-1, 시 대 : 통일신라시대


佛國寺(불국사) 前面(전면) 大石壇(대석단) 西側(서측)에 위치하고 있다.
蓮華橋(연화교)步階(보계) 十段(십단)으로 階段式(계단식) 登桁(등항)을 두고 兩分(양분)하고 登桁(등항)兩端(양단)에는 欄干(난간)의 흔적이 있으나 亡失(망실)되고 石柱(석주)만이 남아있다.

橋下(교하)弧形(호형)石材(석재)東側(동측)白雲橋(백운교)와 같이 穹隆形(궁륭형) 通路(통로)를 만들고 있는데 각 층계에는 蓮瓣(연판)陽刻(양각)되어 주목된다.

七寶橋(칠보교)八段(팔단)寶階(보계)이며 一枚(일매) 長石(장석)登桁(등항)으로 兩分(양분)되고, 石柱(석주)上下(상하)에 남아 있음은 蓮華橋(연화교)와 같다.

다만 規模(규모)의 축소때문에 橋下(교하)通路(통로)를 설치하고 있지 않다.

七寶橋(칠보교)를 올라서면 安養門(안양문)을 지나 極樂殿(극락전)에 이르게 되는데 東側(동측)靑雲橋(청운교) 白雲橋(백운교)雄大莊嚴(웅대장엄)함에 ()하여 優美雅麗(우미아려)한 맛을 풍긴다 하겠다.

新羅景德王(신라경덕왕) 10(751 A.D)金大城(김대성)의 발원으로 佛國寺(불국사)創建(창건)한 바 있다하니 그 당시의 築造(축조)推定(추정)된다.


*연혁(유래)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에 동쪽의 청운교(靑雲橋)와 백운교(白雲橋), 서쪽의 연화교(蓮華橋)와 칠보교(七寶橋)라는 계단이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연화교는 구성면에서 다른 다리와 비슷하지만, 층계마다 연꽃잎이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연화교는 높이 2.31m, 너비 1.48m이며, 칠보교는 높이 4.06m, 너비 1.16m이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10(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석굴암석굴


국보 제24,명 칭 : 석굴암석굴 ,분 류 : 불상,지정일 : 1934.08.27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994, 시 대 : 통일신라시대


경주 吐含山(토함산) 東側(동측) 峯下(봉하)東南向(동남향)하여 東海(동해)()하고 있는데 ()비의 石材(석재)採石(채석) 架構(가구)하여 人工(공인)石窟(석굴)을 만든 것으로 印度(인도)中國(중국)石窟寺院(석굴사원)을 본뜬 것이다.

石窟(석굴)前方後圓(전방후원)形式(형식)이고 圓形主室(원형주실)方形前室(방형전실), 그리고 간도(間道, 비도(扉道))로 구성되고 있다. 主室(주실)穹隆形(궁륭형)으로 그 위에 封土(봉토)로 덮었으며 前室(전실)에는 원래의 盖瓦(개와)지붕이 亡失(망실)되어 1963改修時(개수시)木造建物(목조건물)被覆(피복)하였다.

前室(전실)에는 左右兩壁(좌우양벽)八部神像(팔부신상) () 4()씩을 陽刻(양각)하고 이의 下部(하부)에는 眼像石(안상석)이 받치고 있다.

北壁左右(북벽좌우)에는 仁王像(인왕상)() 1(), 間道(간도) 左右壁(좌우벽)에는 四天王像(사천왕상) 그리고 主室入口(주실입구) 左右(좌우)에는 八角石柱(팔각석주)가 배치되어 있다.

主室(주실)結跏趺坐(결가부좌)降魔觸地(항마촉지)()을 한 本尊佛(본존불)仰伏蓮(앙복연)蓮花臺(연화대) 위에 圓刻坐像(원각좌상)으로 安置(안치)되고 入口(입구)周壁(주벽)天部像(천부상) 2(), 羅漢像(나한상) 10()가 있다.

그리고 本尊佛(본존불)正後面(정후면)에는 十一面觀音菩薩立像(십일면관음보살입상)을 두고 있으며 이 위에는 圓形(원형) 蓮花石(연화석)嵌立(감입)되어 本尊佛(본존불)後光(후광)을 삼고 있고 그 左右(좌우)에는 10()小龕室(소감실)을 설치하여 菩薩 (보살), 居士(거사)()安置(안치)하고 있다.

8세기 中葉(중엽)에 이르러 金大成(김대성)에 의해 建設(건설)된 이 石窟庵(석굴암)神人(신인)妙技(묘기)이며 韓國佛敎(한국불교) 彫刻(조각)代表格(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文獻 : 三國遺事 五卷 孝善 第九 <大城孝二世父母>
慶州市誌 第二六章 <石窟庵>


* 연혁(유래)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景德王) 10(751)에 당시 재상이던 김대성(金大城)이 처음 건립 하였는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石佛寺)'라고 불렸다.

경덕왕(재위 742765)때에는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황룡사대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만들어져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룬다.

석굴의 평면 구조는 앞쪽이 네모났고 뒤쪽은 둥글다.

석굴에는 본존불(本尊佛)을 중심으로 둘레에 천부상(天部像보살상(菩薩像나한상(羅漢像거사상(居士像사천왕상(四天王像인왕상(仁王像팔부신중상(八部神衆像) 등이 조각되어 있다.

인도나 중국의 석굴 사원과는 달리 화강암을 인공으로 다듬어 조립한 이 석굴은 불교 세계의 이상(理想)과 과학기술 그리고 세련된 조각 솜씨가 어우러진 걸작이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둥근형태의 주실 천장을 교묘하게 축조한 것이다.

이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드문 뛰어난 기술이다. 삼국유사, 三國遺事에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건립했다고 전하는 석굴암은 신라 예술의 극치이자 동양 불교미술의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되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록되었다


대릉



대릉원은 신라천년의 영혼을 묻은 고분 23기가 산재해 있는 고분 공원이며,
특히 천마총은 그 구조와 출토유물을 직접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내부를
전시공개하고 있어 그 당시 신라인의 빼어난 문화적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오릉




오릉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과 제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등 신라
초기 네 박씨 임금과 박혁거세왕의 왕후인 알영왕비의 능으로 담암사 북쪽에
있다고 옛 문헌에 전하고 있다.


계림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얽힌 곳으로 사적 제 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첨성대


선덕여왕 때 축조된 현존하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로 절묘한 구조와   기막힌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