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대표하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 유산 장성(長城 : 창청)
"不到長城非好漢(만리장성에 가보지 않으면 호한이 될 수 없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만리장성은 진의 강력한 통일제국체제가 낳은 상징적 산물이다. 베이징에서 서북쪽으로 약 75km쯤 떨어진 곳에 교통이 편리하다는 뜻인 "사통팔달"에서 이름이 유래한 "팔달령"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의 만리장성은 보존이 가장 잘 되어 있어 만리장성 중에서도 대표적인 구간으로 대부분의 만리장성 관광은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곳의 해발고도는 1,015m이며, 산세가 험준한 편이다. 장성 위에서 구불구불 기복이 심한 산세를 따라 멀리까지 뻗어있는 견고한 성을 바라보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춘추전국시대에 지어지기 시작한 장성은 2,0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그 길이가 5천만m에 이른다. 장성은 북방의 유목민족들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지어졌다.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시베리아의 혹한으로 더 이상 북쪽으로는 진출할 수 없게 되자 남쪽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기후가 온화하고 물자가 풍부한 농경지대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만리장성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따라서 만리장성은 단순히 군사적 침략을 막기 위한 방어막인 동시에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문화를 구분하는 경계선의 역할도 했다.
오늘날 말하는 서쪽 감숙성의 가욕관(嘉浴館)에서 시작하여 요녕성 압록강변에 이르는 635만m 길이의 성벽은 대부분 명나라때 지어진 것들이다. 이제는 흘러간 역사의 자취가 된 장성은 세계 7대 건축물, 8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세계적인 유적지이다.
팔달령을 올라가기 위해서는 가드레일과 케이블카를 이용하는데 우리 일행은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으로 향했다.
케이블카의 구조는 두명은 앞을 보며 타고, 두명은 뒤를보며 타는 구조이다.
해발 1,015m라는데, 안전 그물도 없고, 바람이 심해 케이블카는 날아갈 것 같고..
☞ 들어가면서,,
만리장성, 한반도까지 뻗었다”는 주장
일제 식민사관·동북공정 주장과 상통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공식 간행한 <중국역사지도집>에 만리장성을 표시해 놓은 지도가 실려 있다. 거기 표시된 현재의 만리장성 동쪽 끝은 알려진 대로 요동반도 건너편 발해만 연안 산해관이다. 그런데 거기에 또 하나의 굵은 점선, 곧 중국인들이 오늘날 주장하고 있는 옛 진나라 축조 만리장성 원형이라는 게 그려져 있다. 그 동쪽 끝은 요동 북부를 포함하고 압록강 하류를 지나 한반도 북부 내륙 깊숙이까지 들어와 있다.
사마천의 <사기> 하본기는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는 ‘태강지리지’ 얘기를 전하는데, 그 낙랑 수성현이 황해도 수안이라고 비정(比定)한 사람은 실증사학을 내건 이병도였고 그것이 한국 주류 사학계의 정설이 돼 있다. 그런데 그건 이병도의 독창적인 학설이 아니다. 그 전에 일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소속 일본인 연구자 이나바 이와기치가 <사학잡지>에 실은 ‘진장성동단고(진 만리장성 동쪽 끝에 대한 논고)’라는 글에서 그렇게 주장했고 이병도는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이병도는 나름대로 근거를 대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황해도 수안군 산천조의 “요동산. 고을 동북쪽 4리에 있는 진산”이라는 구절의 요동산을 별다른 근거없이 갈석산이라며, 그곳 석성이 바로 만리장성의 일부라 주장했다. ‘재야’사학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이병도가 황해도 수안(遂安)을 낙랑군 수성(遂城)현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오직 “수(遂)자가 같다는 것뿐”이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한나라가 “패수(浿水)에 이르러 (고조선과) 경계를 삼았다”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이 패수가 압록강이라고 한 사람은 일본
고대사 연구의 제일인자요 일제 식민사학의 비조 쓰다 소키치(1873~1961)였다. 쓰다의 충실한 사도 이병도는 한술 더 떠 패수가 청천강이라고 했다. 이병도는 한나라가 고조선 멸망 뒤 설치한 군현, 곧 한4군 중 대방군이 한반도 황해도였다며 기상천외한 입증방법을 동원한다. 예컨대 <한서> 지리지에 낙랑군 속현으로 기록된 ‘둔유(屯有)현’이 황해도 봉산군 대방군 북쪽에 있는 황주라 단정하면서, 그 근거로 <고려사> 지리지 황주목조에 나오는 황주의 옛 고구려적 이름 동홀(冬忽), 또는 우동어홀(于冬於忽) 중 우동어홀의 중간 두 글자 ‘동어’와 ‘둔유’의 “음이 서로 근사”하다는 황당한 증거를 댔다.
이런 비정인지 억지인지로 횡재한 쪽은 중국이다. 그것은 결국 한4군이 오늘날 경기도 북부까지 포함하는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얘기고, 그것은 진의 만리장성이 한반도 내륙까지 뻗쳐 있었다는, 한반도 상당 부분이 옛 중국땅이었다는 그들의 주장, 동북공정 사관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에서 지은이는 중국의 동북공정 사관과 쓰다의 식민사관을 ‘일란성 쌍생아’로 규정한다. 쓰다와 이나바, 이마니시 같은 아시아침략에 동원된 일제 관학자들이 한4군이 한반도 안에 있었고, <일본서기>나 <고사기> 등 일본 사서들의 신빙성을 결정적으로 허무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등 한반도쪽 기록은 후대에 날조된 거짓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면서 수다한 반증자료들을 모조리 물리친 것은 바로 식민지배의 정당화를 위한 작업이었다. 그들은 요동과 요서, 지금의 베이징을 포함한 북중원 일대를 무대로 중국 고대왕조들과 겨룬 고조선이나 고구려에 관한 수많은 기록들을 모조리 무시하거나 왜곡했다. 그들이 집요하게 한반도 안에 한4군이 있었다는 주장에 매달린 것은 한반도에는 독자적인 역량을 지닌 역사주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일제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압록강 바깥이 한국사의 무대였던 적이 없고 한반도는 수많은 소집단이나 소국으로 분열돼 있어야 <일본서기>가 주장하는 왜의 신공황후 신라정벌과 수백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씨가 먹히고 한반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다.
이런 일제 식민사관은 한반도의 독자적 역사 주체성을 철저히 부정하고 한반도를 중국이나 일본 역사의 부속물 정도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 사관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중국 동북공정은 바로 일제 식민사관을 그대로 도용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 동북공정은 우리 내부의 일제 식민사관을 극복하면 자연히 무력화되는 것이다
----출처 한겨레---
☞ 생각하면서,,
중국 진(秦),한(漢)은 흉노(匈奴)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국경에 만리장성을 축조하였고 당(唐) 태종은 만리장성 북쪽의 이민족국가를 복속하고 세계 제국 건설의 야심을 가져 만리장성 북쪽의 돌궐(突厥)을 침략하는 등 위협적이었으므로 고구려는 당,유목민족의 침략에 대비하고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요하(遼河)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조했다.
중국이 북방 이민족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국경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은 것처럼, 고구려(高句麗) 연개소문 또한 외국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국경인 요하(遼河)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았는데 북간도 지역인 부여성(扶餘城:농안)에서 시작하여 서간도 지역의 발해만(渤海灣)에 있는 비사성(卑沙城:대련)에 이르는 1000리가 되는 장성이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백악(白嶽:북악산)과 목멱(木覓:남산)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 앞 환구단(圜丘壇)에서 천제(天祭)를 올리고 황제에 즉위하며 천하에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는다고 천명하여 대한시대가 시작되어 대한제국이 1919년 대한민국으로 계승됐다.
대한국(大韓國)은 한반도 간도(間島) 녹둔도 제주도 대마도 동해(East Sea) 독도(Dokdo)를 비롯한 인접 도서,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애국가를 상징으로 한 제국으로서 북으로는 말갈(靺鞨:간도)에서 상아와 가죽을 생산하고, 남으로는 탐라(耽羅:제주도)을 거두어 귤과 해산물을 공(貢)받은 대한국 고종황제는 제주에서 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를 통치했다.
대한제국 고종황제는 1902년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하여 간도(間島)에 대한 직접적인 관할권을 행사하였으며 1905년 11월 17일 고종황제가 비준하지 않아 불법, 무효인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는 1909년 9월 4일 간도의 이권을 얻기 위해 불법적으로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고 대한제국령 간도의 영유권을 청에 불법 양도했다.
3·1 대한광복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3일 한민족사 최초로 주권재민, 삼권분립을 선언한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해에 수립되어 대한광복운동을 전개하여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1910년 경술늑약(庚戌勒約)으로 불법 병탄(倂呑)당한 대한국의 국권을 회복하는 대한 광복(光復)을 하였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간도(間島)가 1945년 대한 광복 이후에도 미수복 영토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100년이 지난 2009년 현재까지 대한민국은 공식적으로 중국에 간도영유권을 주장한 적이 없다. 정부는 헌법을 개정하여 대한민국의 대한제국 국체 및 영토 계승을 공식 천명하고 중국과 만리장성과 천리장성의 중간선을 한중 국경으로 하는 국경조약을 체결해야 한다.
몽염(蒙恬)장군은 진시황의 충신으로 만리장성 축조를 진두지휘한 역사인물이다. 그러나 진시황이 죽자 2세 황제 호해(胡亥)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절명의 순간 몽염은 통탄했다. 임조에서 랴오둥까지 장성을 1만여리 쌓는 동안 지맥을 끊어놓은 자신의 죄과가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몽염일가가 맞은 참극의 본질이 그 반민중적 행보에 있음을 날카롭게 갈파해냈다. “몽염이 진나라를 위해 쌓은 만리장성의 요새를 보니 산을 깎아내리고 골짜기를 메워 직도를 통하게 했는데, 이는 참으로 백성의 노고를 가벼이 여긴 것이다. 진나라가 제후들을 멸한 초기, 천하의 민심은 안정되지 못하였으나 몽염은 명장이면서도 이때 강력히 간언하여 백성의 궁핍을 구제하고 모든 백성들에게 평화를 주려고 힘쓰지 않았다. 오히려 시황제의 야심에 동조하여 공사를 일으켰으니, 그들 형제가 죽임을 당한 것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어찌 지맥을 끊은 것에 죄를 돌리려 하는가?”(<사기·몽염열전>). 중국의 문호 루쉰은 이 장성의 중국적 함의를 한마디로 정리했다. ‘저 위대하고도 저주스러운 장성이여!’
≪지배세력 책략 폭로한 카프카≫
이 만리장성에 대해 프란츠 카프카는 그 축조방식을 문제삼았다. 카프카는 스스로 장성축조 당시 건설에 동원된 토목감독으로 분하여, 장성이 부분축조체제로 만들어졌음을 증언해냈다(<만리장성의 축조 때>). 카프카는 부분축조방식이 대역사공정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한 지배세력의 책략임을 폭로한다. 공사 5년차, 모두가 지쳐갈 즈음, 지배세력은 노역자들을 여행시켜 곳곳에 부분축조된 장성의 위대함을 보고 민족적 사명감을 일깨워 다시 건설현장에 나서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민족의 침입을 막고 치세를 이루겠다던 진시황의 거사는 30년 명운의 왕조의 침몰로 귀결됐다.
그런데 100년 전 카프카는 왜 장성축조방법을 문제 삼았을까. 그것은 황정(皇政), 무소불위의 황권과 구중궁궐로 표상되는 겹겹의 관료체제가 장성이 무용지물임을 알면서도 축조를 계속하며 장구한 세월 백성들을 수탈·지배해온 역사적 폭력을 추문하는 것이다. ‘실제로 엄연히 있는 무엇, 수십만의 노력과 삶의 결과인 장성은 무엇 때문에 쌓았는가’를. 20세기 초 자본의 시대, 노동자재해보험국원이었던 카프카는 어느 새벽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쓸쓸히 죽음을 맞는 외판사원 그레고르의 참상을 소설 <변신>에 그려낸 바 있다. 중국과 유럽, 기원전과 20세기초라는 시공간적 거리의 삶의 간극을 이어놓은 카프카, 그가 부분축조로 재현해낸 역사풍경들의 장성은 지금 한반도에도 이어진다. 4대강 개발이라는 정부의 치수(治水)계획에까지.
정부는 4대강을 살리겠다며 5대 추진과제(유기적 홍수방어대책, 풍부한 수자원확보, 수질개선 및 생태복원,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복합공간 창조 및 강중심의 지역발전)를 긴급 공표했다. 그러나 22조원을 들여 ‘물관리 글로벌 리더’가 되는 일이 우리 사회의 긴급한 현안과제인지 묻고 싶다. 지난 수십 년간 개발의 불도저에 치명상을 당해온 강들이 다시 난개발 광풍에 휩쓸리는 것도 문제거니와 생산 없는 지역경제의 명운을 강들에 떠맡기는 것도 말이 안된다.
☞ 둘러보기,,
'살며 생각하며 > 내삶의 반올림th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단공원(天壇公園) (0) | 2009.09.21 |
---|---|
이화원(頤和園) (0) | 2009.09.21 |
역사가 숨쉬는 도시, 자금성 (0) | 2009.09.21 |
부모님 살아 생전에.. (0) | 2009.09.21 |
기축년 결혼기념일에 부치는 편지 (0) | 2009.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