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원(頤和園)의 역사
이화원은 원래 금나라(金朝: 1115-1234)의 행궁行宮으로 조성되었다.
원나라(元朝: 1247-1368)의 몽고황제 쿠빌라이 칸(Kublai Khan)은 서산西山에서 이화원까지 운하를 건설하여 북경의 용수공급을 개선했다. 그는 또 저수지로 사용하기 위해 호수(지금의 곤명호)를 확장했다.
청나라 강희 41년(1702년) 행궁이 건설되었고, 건륭 15년(1750년)부터 26년까지 대규모 원림이 이루어졌다. 1765년 실질적인 황실정원이 되면서 청의원(淸漪園 Clear Ripples, 칭이위안)으로 불렀으며, 황제는 원명원에 머물렀다.곤명호는 항주杭州의 서호西湖를 모방하여 호수를 더욱 확장했다.
1860년 2차 아편전쟁이 일어나 북경이 함락되고 청의원과 원명원은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25여년이 흐른 1888년, 서태후(자희태후)는 환갑 축하연을 베풀기 위해 청국의 해군 증강용으로 준비해 두었던 중국 해군 북양함대의 자금 30만 냥을 유용하여 청의원을 재건하고 이화원이라 개명하였다. 이 사건은 후일 청일전쟁 대패의 결정적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청일전쟁 당시 해군이 대포를 발사하였는데, 화약이 들어갈 자리에 모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1990년, 의화단 사건으로 연합군에 의해 또 다시 파괴되는 운명이 되었다.
1902년, 서태후에 의해 이화원이 다시 재건되었다.
1912년, 청나라(1644-1912)는 멸망하였다. 서태후의 환갑잔치인 188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의 25여년 세월은 정치가 문란하고 외세 압력이 극에 달했다 하더라도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1998년 이화원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호수의 멋스러움에 낭만을 즐긴다.
한 개인의 탐욕과 사치의 광기가 빚어낸 몰락의 드라마이다. 서태후만 그런가! 조선시대 흥선대원군과 명성왕후 시기에는 어떠했던가? 폐쇄적 사회를 지향하고 군대를 축소하고(신식군대로의 이향은 이루어졌지만) 정치를 어지럽혔던 인물들이 아닌가?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일본군에 의한 민비 시해(명성왕후)라는 굴욕적 사건을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동정을 보내야 하는가?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조선 백성들을 불신지옥으로 떨어지게 한 장본인들인 것이다.
☞ 들어가면서,,
주위 8km. 인공호인 쿤밍호[昆明湖]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그 흙을 쌓아올려 만든 완서우산[萬壽山]이 북부에 있고 모든 건축물은 산 남쪽에 집중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통칭 천간낭하(千間廊下)라고 불리는 장랑(長廊)이 눈길을 끈다. 12세기 금나라 때 지은 작은 궁전을 시초로 명조(明朝) 중엽에 만들어졌으며, 청조(淸朝)의 건륭제(乾隆帝)가 많은 전각(殿閣)을 세우고 정원을 꾸몄다. 서태후(西太后)가 살았던 별궁으로서 유명하다. 1860년 톈진[天津] 조약의 비준을 강요하는 영국•프랑스 연합군 8만이 베이징 서쪽 교외의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웠을 때 이곳도 화재를 입었다. 1894년 서태후는 환갑 축하연을 베풀기 위해 해군증강용으로 영국에서 차용한 돈까지 개축을 위해서 횡류(橫流)하였는데, 이것이 청 •일전쟁(淸日戰爭)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베이징 최고의 관광명소로 호상에 떠 있는듯한 석주(石舟)와 석교(石橋), 해당화 •난초 •수양버들, 색채가 선명한 건축물과 장랑(長廊) 등이 경관의 조화를 이룬다. 1998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 생각하면서,,
청나라 함풍제의 후궁이자 동치제의 생모이다. 함풍제가 사망한 후 6살이 된 아들 동치제를 황제로 등극시키면서 실질적인 권력은 여제인 서태후가 관할하게 되었다. 1875년 동치제가 사망하자 서태후는 황제 계승법을 위반하면서까지 3살 된 조카 광서제를 즉위시킴으로써 국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190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청나라는 무려 48년 동안이나 서태후에 의해 통치되었다.
서태후가 세상을 떠나기 10년 전인 1898년 광서제는 무술변법을 시행하였지만 서구열강에 반대하는 보수파였던 서태후와 정치적 갈등을 빚었고, 10여년간의 연금생활 끝에 서태후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토록 서태후는 "자비로운 여인"이란 뜻의 이름과는 달리 잔혹할 정도로 냉정했으며, 야심에 불탓고 사치스러웠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는가 하면, 한 끼 식사에 128가지 이상의 산해진미가 올라와야 했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었다. 말년에 자신이 은거할 장소로 베이징의 이화원을 대대적으로 재건하였는데, 이 때 해군비를 탕진하여 결국 청의 명말을 재촉한 원인이 되었다.
☞ 둘러보기,,
'살며 생각하며 > 내삶의 반올림th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경일기 (0) | 2009.09.21 |
---|---|
천단공원(天壇公園) (0) | 2009.09.21 |
중국을 대표하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 유산 장성(長城 : 창청) (0) | 2009.09.21 |
역사가 숨쉬는 도시, 자금성 (0) | 2009.09.21 |
부모님 살아 생전에.. (0) | 2009.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