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 간 : 2009.09.11~09.14
○ 출 발 : 19:00(인천공항 KE853) ⇒ 20:40(북경공항) ⇒ 숙소(준5성 호텔)
○ 오는길 : 22:00(북경공항 KE805) ⇒ 23:20(인천공항도착) ⇒ 집(02:30)
▶ 1시간 반만에 북경 공항에 도착했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여행사에서 준비한 버스를 타고 북경 시내의 야경을 보면서 호텔로 향한다.
가이드의 여행일정이 안내와 룸을 배정받으니 아쉽게도 하루 일정이 끝났다.
▶둘째 날, 버스에 탑승, 팔달령에 도착했다. 중국에서는 장성이라 부르는데 관광객이 가장 많이 관람하는 팔달령을 보기 위해 케이블 카를 타고 올라갔다. 달에서도 식별 가능한 지구의 유일한 인공 건축물인 만리장성은 성벽의 높이가 7~8미터 되는 곳도 있으며 말 몇 마리가 동시에달릴 수 있도록 도로나 다름없이 축조되어 산꼭대기를 연결하고 있다.
책이나 TV에서만 보았던 만리장성의 망루에 오르니 감격스럽다. 노점상이나 기념품 가게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다니는지 한국 돈 천원, 오천원을 외치며 물건을 팔고 있다. 만리장성 관람 후 용경협으로 향한다. 용경협은 협곡을 70미터 높이의 댐을 막아 놓은 곳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 258미터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 여름에는 유람선을 타고 유적지와 깎아지른 절벽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하는데 겨울에는 댐의 얼음으로 조각을 만들어 전시하는 빙등제(氷燈祭)가 열린다고 한다.
▶셋째 날, 북경 시내로 접어드니 2층 버스와 버스 2대가 연결된 긴 버스, 전차 등 다양한 교통 수단이 눈에 들어온다. 전차는 북경의 중요한 교통 수단이라고 한다. 빨간색택시들은 운전사 보호를 위해 운전석을 뒷면은 아크릴 판으로 옆면은 창살로 막아 놓는데 올림픽을 대비하여 철거했지만 강도사건이 끊이지 않아 다시 부착한 차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천안문 광장에 도착하니 안개가 채 걷히지 않아 멀리 천안문이 희미하게 보이고 주위에는 아침 출근길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과 여행자들로 붐빈다.
천안문을 통과하니 자금성 정문이 나온다. 자금성은 방이 1만개에서 반 칸 부족하며 중국에서 가장 크고 잘 보존된 고궁이라고 한다. 자금성에 들어가니 바닥까지 대리석이 깔려 있으나 우리의 고궁과는 달리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 없는데 자객이 숨지 못하도록 나무를 심지 않았다고 한다. 단문, 오문, 태화문을 지나 황제가 정사를 돌보고 의식을 행하던 태화전, 중화전,보화전을 관람하고 황제가 일상생활을 하던 건천궁, 교태전, 곤녕궁 등 내정을 돌아보고 휴식을 취했다는 정원에 이르니 곳곳에 기암괴석으로 바위산이 만들어져 있었다.
고대 예술품과 공예품이 보존되어 있고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황궁 관람을 마치고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이화원에 갔다.
▶이화원은 청나라 황궁의 별궁이며 중국 4대 정원의 하나로 최대의 크기를 자랑하는 황실 정원이다. 서태후가 해군 전함 건조 목적으로 직접 만든 곤명호는 인공 호수이며 파낸 흙을 쌓은 곳이 만수산이 되었다. 서태후의 여름 별장인 이화원은 침실과 외국 사절을 접견한 인수전, 서태후가 사용했던 물건이 전시되어 있으며 수십 톤에 달하는 기암괴석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다. 가장 유명한 장랑(긴 복도)은 728미터로 천장에는 꽃과 나무, 서유기, 삼국지 등에 나오는 장면이 천 여 점의 화려한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저녁 식사 전 북경 최고의 번화가로 우리의 명동과 같은 백화점과 야경을 보고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왕부정거리에 갔다. 삼성, LG 휴대폰 광고판이 단연 돋보이게 설치되어 있고 즐비하게 늘어선 포장마차와 음식 가게, 음식 천국이라 할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음식에서 중국 사람들의 생활상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날 아침, 호텔 체크아웃하고 짐을 챙겨 관광버스에 올랐다. 오늘 첫 관람지인 천단공원에 도착했다. 공원 입구부터 여기 저기 음악을 틀어 놓고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고, 물로 보도 블럭에 붓글씨를 쓰는 사람, 아쟁을 연주하는 사람, 제기 차기, 카드놀이 등 다양한 종류의 놀이를 즐기는 노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천단은 명, 청 시대 황제가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가장 중심이 되는 건축물인 기년전은 높이 38미터의 3중 처마로 된 못이 하나도 사용되지 않은 목조건물로 가장 크고 아름다우며 중국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당시의 황제들은 천자로 대자연과 천지를
숭배하고 제사 지내는 것이 중요 업무였기 때문에 하늘을 상징하는 건축물을 많이 지었다고 한다.
▶북경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여행했던 곳이 영화를 다시 보듯 머리 속을 스쳐지나 간다. 비행기에 오르니 여행이 꿈만같고 다른 나라도 많이 많이 구경하고 싶어진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북경의 모습은 차츰차츰 멀어진다.
☞ 여행을 마치면서,,
신해 혁명후 100년 그들이 다시 움직인다.
그곳은 단제께서 직접 통치한 고조선의 진한 땅, 고조선의 수도가 있던 땅이었다.
일본!
그리고 이스라엘...
그들은 오래전 부터 이 영험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
왜일까 ?
그 이유는 자명하지 않은가....
역사를 알면 그 이유는 자명해 지는 것....이제 그 시기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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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100만 인구가 1억 한족 정복해 280년간 중국을 지배한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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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소수민족] 만주족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09년.
중국 대륙의 주인은 한족이 아닌 만주족(滿洲族)이었다.
중국의 최고 권력자는 앞머리를 ‘빡빡’ 밀고 변발을 늘어뜨린 만주족 황제였다.
각 지방의 성(省)은 대개 한족 관료들이 다스렸지만 군사권은 만주족 수중에 있었다.
만주족 장군들은 한족의 소요사태를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한족 공산당 간부가 군사권과 인사권을 틀어쥐고
소수민족 엘리트가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현재 상황과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됐다.
2년 뒤인 1911년에야 한족은
‘멸만흥한(滅滿興漢·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킨다)’을 부르짖으며 신해혁명을 일으켰다.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한족은 중국 대륙을 다시 탈환했고 만주족 황제를 베이징의 자금성에 감금했다.
만주족을 쫓아낸 한족은 만주족의 이름을 ‘만주(滿族·만족)’로 바꿔버렸다.
부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후 한때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인구 1068만명의 만주족은
성(省)급 자치구도 하나 없는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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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루·물길·숙신·말갈·여진 등 다양하게 불려...
1636년 청 세우면서 ‘만주족’으로 명칭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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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은 본래 △읍루 △물길 △숙신 △말갈 △여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1636년 청나라를 건국하면서 중구난방으로 불리던 명칭을 ‘만주족’으로 통일했다.
‘만주’라는 이름은 ‘문수사리’를 일컫는 산스크리스트어(범어) ‘만주슈리’에서 나온 말로 알려졌다.
불교 용어 ‘만주슈리’는 ‘대단히 좋은 행운’을 뜻한다.
만주족과 한족은 외관상 큰 차이가 없다.
광범위한 혼혈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다만
좁은 미간과 곧은 콧날, 밝은 피부색, 사각형의 얼굴은 전형적인 만주족의 생김새로 여겨진다.
혈액형 가운데 B형이 전체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한 가지 특징이다.
하지만 성(姓)을 보면 만주족과 한족을 대개 구분할 수 있다.
만주족 가운데는
△퉁( ·동) △관(關·관) △마(馬·마) △쑤어(索·제) △치(齊·제) △푸(富·부) △나(那·나) △랑(郞·랑) 8개 성씨가 비교적 많다.
이들 8개 성은 한족 가운데는 드문 성씨로 2자 이상의 만주족 복성(複姓)을 단성(單姓)화한 것이다.
예컨대
‘루바얜(如巴顔)’이란 만주식 성은 비슷한 의미의 ‘푸(富·부)’씨로, 만주족 황실(皇室)의 성인 ‘아이신줴뤄(愛新覺羅)’는 ‘진(金·김)’씨로 바꾼 것이다.
때문에 김씨 성을 가진 우리나라 사람은 중국에서 종종 만주족 황족의 후예로 오인 받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씨인 김씨는 900여개가 넘는 한족들 성씨 가운데 희귀한 성이다.
한때 중국 전역을 지배했던 민족이라 교육수준은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높다는 평가다.
지난 1990년에 실시한 한 조사에서 만주족 1만명당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은 1652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소수민족을 포함한 중국 전체 평균(139명)보다 거의 10배 이상 높은 숫자다.
심지어 한족(143명)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이다.
또
15세 이상을 대상으로 한 ‘문맹 및 반(半)문맹 실태조사’에서도
만주족 가운데 1.41%가량만 문맹 혹은 반문맹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전체 평균 22%보다 거의 20%포인트 이상 낮은 수준으로 역시 한족(21%)보다도 낮다.
높은 교육수준을 바탕으로 만주족은 예술 쪽에 두각을 나타냈다.
문화대혁명 때 투신자살한 중국의 인민소설가 라오서(老舍)를 비롯해
홍콩 영화 ‘황비홍’ ‘동방불패’ 등에 출연하며 청순한 외모로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배우 관즈린(關之琳·관지림),
현재 중국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남자 배우 중 하나인 후쥔(胡軍)도 만주족 출신이다.
또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서 피아노 연주를 선보인
중국의 천재 피아니스트 랑랑(郞朗·27)도 랴오닝성 선양에서 태어난 만주족이다.
지난 1995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영재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랑랑은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음악가 중 한 사람이다.
지난해 수입만 9100만위안(약 180억원)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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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 3성의 만주족, 베이징과 가까운 랴오닝성에 10% 거주,
선양엔 황궁과 황제들 무덤 보존돼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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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만주족이 주로 거주하는 곳은 동북 3성(랴오닝성·지린성·헤이룽장성) 일대다.
만주는 동북 3성을 통칭하는 지명이기도 하다.
그중
베이징과 가까운 랴오닝성에는 만주족 전체 인구의 10%에 달하는 100만명가량이 살고 있다.
랴오닝성 번시(本溪)와 환런(桓仁) 등에는 만주족이 모여 사는 만주족 자치현(縣)이 6개나 설치돼 있다.
1644년 만주족이 만리장성 동쪽 끝에 있는 산해관(山海關)을 돌파해 중국을 정복했을 때
처음 수도로 삼으려고 했던 곳도 베이징이 아닌 랴오닝성 선양이다.
당시 만주족 강경파들은 “베이징에 있는 한족을 몰살시키고 선양에 수도를 정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만주족은 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보다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선양을 버리고 베이징으로 남하했다.
때문에 지금도 동북 3성 최대 도시인 선양에는 만주족 황제들의 무덤은 물론
베이징에 입성하기 전까지 살았던 만주족 황궁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선양의 만주 황궁은 베이징에 있는 고궁(자금성)과 함께 중국의 2대 황궁으로 꼽힌다.
오히려 보존상태는 고궁보다 더 뛰어나다는 말도 나온다.
베이징으로 내려간 뒤 만주족은 자신의 고향인 동북 3성 일대를 성역화했다.
특히 랴오닝성과 지린성의 경계에는 975㎞에 달하는 버드나무 경계를 세우고
한족과 몽골족이 출입하는 것을 엄금했다.
‘유조변’으로 불리는 버드나무 경계는 지금도 일부 남아있다.
한족들이 만리장성을 쌓아 이민족과 자신을 분리한 것처럼
만주족 역시 버드나무를 세워 이민족과 경계를 삼은 것이다.
대륙에서 한족에게 쫓겨날 경우를 대비해 돌아갈 땅을 마련한 것이기도 하다.
만주족이 대거 거주한 선양은 ‘버드나무 도시’란 뜻에서 ‘무크덴’으로 불리기도 한다.
만주족이 남하해 텅 빈 땅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간 조선족이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만주와 한반도의 경계에 있는 백두산을 신성시하는 것은 조선족과 만주족의 공통점이다.
조선족과 만주족은 동북 3성 일대에 함께 섞여 살고 있다.
이들 두 민족은 외형상으론 구분하기 힘들지만 개고기 식용 여부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개고기를 즐겨먹는 조선족과 달리 만주족은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심지어 만주벌판의 겨울철 삭풍에도 불구하고 개털로 만든 모피는 절대 입지 않는다.
만주족의 선조라고 할 수 있는 누르하치가 한족에게 쫓기던 중
누렁이(黃狗)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한 이야기가 만주족 사이에 전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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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국 전통의상인 치파오는 만주족이 입던 옷...
만주 황실요리인 ‘만한전석’도 최고 요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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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문가들은
“오늘날 중국인들은 만주족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중국 영토의 윤곽을 만든 것은 한족이 아닌 만주족이기 때문이다.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기 전 한족들의 영토는 대략 지금의 2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최근 국제 문제로 부상한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시짱(西藏)티베트자치구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등은 모두 만주족이 정복하고 확장한 지역이다.
심지어 만주족은 지금은 독립국으로 남아있는 몽골(외몽골)까지 영토에 포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해혁명으로 만주족이 쫓겨나자 이들 지역도 연달아 독립을 선포했다.
오늘날 중국 내 소수민족 문제의 직접적인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1949년 신중국 건국 이후 대부분의 소수민족 자치구는 재점령했지만
외몽골은 아직도 수복하지 못한 상태다.
때문에 일부 한족들은 “외몽골도 다시 찾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 국영방송인 CCTV에서 가장 많이 방영하는 역사 드라마도 만주족을 소재로 한 드라마다.
비교적 가까운 시대의 이야깃거리라서 자료가 풍부하고 고증이 쉽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도 베이징 곳곳에는 만주족 황족과 귀족들이 살던 저택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특히 청나라의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3명의 황제에 관한 이야기는
각각
△강희왕조(2001년) △옹정왕조(1997년) △건륭왕조(2002년)와 같은
CCTV 대하드라마로 제작돼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한족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보면서
만주족 황제가 변방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가 소수민족을 정벌하는 장면에 열광한다.
물론 TV 드라마에서 만주족 황제 역을 맡는 배우들은 대개 한족 배우다.
또 드라마 속의 만주족 황제는 만주 전통복장에 변발을 하고 있지만 만주어가 아닌 한어를 구사한다.
만주족은 한어와 다른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만주어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중국 학계의 고민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이들 만주족을 소재로 한 드라마는 우리나라에도 케이블과 위성TV 등을 통해 방영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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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 신장·시짱·네이멍구 등 정복, 영토 확장...
현재 국경도 한족 아닌 만주족이 만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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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의 영향은 이뿐만 아니다.
중국에서 귀빈을 대접할 때 내놓는 청나라 황실요리 ‘만한전석(滿漢全席)’도
만주족 요리와 한족 요리로 구성돼 있다.
‘차이니즈 드레스’로 불리는 ‘치파오(旗袍)’도 한족이 아닌 만주족의 전통복장이다.
만주 ‘기인(旗人·만주족 군사·행정 편제에 속한 사람)’들이 입는 옷이란 의미의 ‘치파오’는
본래 남녀 구분이 없었으나 현재는 여성이 입는 옷으로 의미가 줄어들었다.
오른쪽 어깨부터 겨드랑이 사이를 끈 단추로 여미는 치파오는 옷깃은 높고 소매가 좁은 것이 특징이다.
또 치마 옆이 길게 트이고 몸에 쫙 달라붙는 옷의 형태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관능적인 옷이란 말도 듣는다.
1972년 미·중 수교 때 방중(訪中)한 미국 닉슨 대통령의 영부인 패트(pat) 여사가 치파오를 입은 중국 여성을 보고 “중국의 인구가 왜 세계 제일인 줄 알았다”는 말을 남겼다는 일화도 있다.
당초 한족들은 치파오를 오랑캐의 옷이란 뜻에서 ‘호복(胡服)’으로 불렀다. 청나라 사람들의 옷이란 의미에서 ‘칭좡(淸裝)’으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족의 문화로 완전히 흡수해 한족의 전통복장으로 변화시켰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메달 시상 도우미가 입었던 옷도 개량 치파오다. 결혼식 때 중국 신부들이 하얀 웨딩드레스와 함께 입는 옷도 대개 붉은색 치파오다.
한때 여대생들 사이에 ‘치파오’를 입고 졸업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상하이탕(上海灘)과 같은 홍콩 브랜드는 1930년대 상하이풍 치파오 디자인 콘셉트로 의류와 패션 소품을 출시해 세계적인 명품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최근에는 만주족의 치파오 대신 한족 전통의 옷인 ‘탕좡(唐裝)’이 상대적으로 각광 받고 있다. 당나라 옷이란 뜻의 ‘탕좡’은 치파오와 달리 넓은 소매와 펑퍼짐한 치마가 특징이다. 농경 정착민족인 한족은 소매 폭이 넓고 펑퍼짐한 옷을 선호했다.
지난 2001년 상하이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들이 입었던 중국 전통의상도 ‘탕좡’이다. 한족 민족주의로 무장한 장이머우(張藝謀) 같은 5세대 영화감독들은 영화 속에서 치파오 대신 한족 전통 의상인 ‘탕좡’을 선호한다.
장이머우가 총감독한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때도 ‘치파오’가 아닌 ‘탕좡’을 입은 배우들이 개막식 공연에 대거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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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꿈, ‘마지막 황제’ 푸이 내세워 만주국 건립....
독립 부추긴 일제의 패망과 함께 물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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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실상 한족과 동화됐지만 한때 만주족도 독립을 꿈꿨다.
과거 일제는 만주족이 처한 상황을 이용해 이들의 독립을 부추기기도 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아이신줴뤄 푸이(선통제)를 내세워 동북 3성과 네이멍구 일대를 근거지로 하는 만주국을 세운 것이다.
푸이도 이에 흔쾌히 동의하고 지금의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을 수도로 하는 만주국의 황제(강덕제)로 등극했다.
당시 창춘은 베이징(北京)을 대신하는 ‘새로운 수도’라는 뜻으로 신징(新京)으로 불렀다. 백두산을 끼고 있는 지린성 일대는 만주족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현재도
창춘에는 만주국 초대 황제 푸이가 살았던 황궁과 정부청사에 해당하는 국무원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하지만 일본의 패망과 함께 마지막 만주족 황제 푸이는 정치범으로 붙잡혔다. 이후 약 9년 동안 감옥에서 복역하다 한족 마오쩌둥의 특별사면으로 출소한 뒤 베이징 식물원의 정원사로 전락했다.
1967년에 암으로 사망한 푸이는 28년이 지난 1995년에야 비로소 만주족 황릉에 안장됐다. 푸이의 일대기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로 잘 알려져 있다.
현재 푸이가 살던 창춘의 황궁은 ‘외세에 의한 민족분열’을 경고하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늘날 만주족이 독립하거나 다시 한족을 정복하는 것은 꿈 같은 얘기”라고 단언한다.
100여년 전 중국 전역을 지배하면서
전국 31개 성(省)과 자치구로 만주족이 흩어져 버린 것도 독립의 가능성을 낮게 만드는 요인이다.
중국 대륙 각지에 퍼져있는 만주족들은 과거 만주족 팔기군(만주족의 주력군단)의 후예들이다.
만주족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동북 3성을 비롯한 허베이(河北)성과
네이멍구 자치구 등이 수도 베이징과 너무 가깝다는 점도 독립 움직임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반면 가장 활발한 소수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신장 위구르자치구나 시짱 티베트자치구는 베이징과 수천㎞ 이상 떨어져 있다.
명(明)을 제외한
요.금.원.청의 역사는 남의 역사가 아니다.
이제 그 역사의 소용돌이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보이는가 ?
그 100년의 역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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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 (辛亥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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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에 일어난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 제1혁명·민국혁명(民國革命)이라고도 한다.
이 혁명에 의해 청(淸)나라가 멸망하여
2000년간 계속된 전제정치가 종말을 고하고, 중화민국이 탄생하여 민주공화정치의 기초가 이루어졌다.
≪혁명의 배경≫
신해혁명은 소수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쇠퇴와,
한민족(漢民族)을 중심으로 한 중국민중의 이반(離反)에 연유한다.
백련교도(白蓮敎徒)의 난을 비롯하여 여러 사건을 겪은 뒤,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이 터지고 열강의 침략이 거세어져
중국 식민지화의 위기가 한층 심해진 상황에서,
청나라는 외국에 대해 종속적 태도를 취하면서도
왕조의 유지를 위해 중앙집권체제의 재건을 꾀하여 제도개정·입헌준비·실업장려(實業奬勵)·군비강화 등을 내용으로 한 신정운동(新政運動)을 일으켰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인해 구세(舊稅)의 증징(增徵)과 새로운 세금의 증설이 불가피하게 되어 사회적 모순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신정반대·납세거부·이권회수 등을 주장하는 전국적인 대중투쟁의 전개를 초래하였다.
이와 함께 지방의 유력자와 상공업계를 기반으로 한 입헌파가 형성되어 입헌군주제를 목표로 국회의 속개운동(速開運動)이 전개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화교(華僑) 외에도 일부 상공업계와 재일본 유학생 및 국내의 지식청년층을 기반으로 하여, 쑨원[孫文(손문)] 등의 혁명파가 1905년에 중국동맹회를 결성하여 민주공화 실현을 목표로 비밀결사조직인 회당(會黨) 등과 손을 잡고 반청무장투쟁(反淸武裝鬪爭)을 전개하였다.
≪혁명의 과정≫
1911년 5월 재정난에 빠진 청나라는 철도국유령을 선포하여 민영철도를 국유화하고, 이를 담보로 열강의 금융자본연합체인 4국차관단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빌려 재정난을 타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운동이 후난[湖南(호남)]·후베이[湖北(호북)]·광둥[廣東(광동)] 등지에서 일어났으며, 쓰촨[四川(사천)]에서는 대규모 무장투쟁으로 발전하였다(쓰촨폭동).
그해 10월 초
청나라가 쓰촨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후베이신군[湖北新軍(호북신군)]을 동원하자,
우한지구[武漢地區(무한지구)]에서 문학사(文學社)와 공진회(共進會) 등을 조직하여
군대에 대한 혁명공작을 하며 후베이신군 내에서 세력을 확장해 오던 혁명파는,
마침내 10월 10일 우창[武昌(무창)]에서 봉기하여
중화민국 군정부를 세워 신해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우창봉기).
혁명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파급되어 1개월 이내에 거의 모든 성(省)에서 호응하여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난징지구[南京地區(남경지구)]를 공략한 각 성의 대표는
1912년 1월 1일에 해외에서 군자금 모집을 맡은 쑨원을 맞아들여
난징임시정부[南京臨時政府(남경임시정부)]의 임시대총통으로 추대하고 중화민국을 발족시켰다.
쑨원은 <혁명시대의 정부>의 과제는
민족·영토·군정·내치·재정의 통일에 있다고 하였으나 밖으로는 일본·영국 등의 열강이, 안으로는 임시정부 내 입헌파 등이 책동하고 혁명파의 내부대립 등으로 말미암아 <북벌>에 의한 혁명의 철저화가 곤란해짐으로써 남북화의(南北和議)가 진행되었다.
이보다 앞서
청나라는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를 기용하여 혁명군의 토벌을 명하였지만, 내각을 조직하여 군정양권(軍政兩權)을 장악한 그는 영국을 중개자로 화평을 획책하였고, 청나라의 선통제(宣統帝)를 퇴위시키는 조건으로 쑨원으로부터 임시대총통의 지위를 뺏고, 3월 10일 정식으로 대총통에 취임하여 베이징정부[北京政府(북경정부)]를 발족시켰다.
혁명파는 위안스카이에게 법제적 구속을 가하기 위해 다음날 난징에서
<중화민국임시약법>을 공포하였는데, 이것은 헌법의 초안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 주권재민(主權在民)과 인민의 자유·평등의 권리를 규정하였다는 점에서 획기적 의의를 가진다.
또한
내각책임제를 도입하고 국무총리에게 큰 권한을 부여하여 대총통의 전횡(專橫)을 예방하려고 하였다. 4월 1일 쑨원이 정식으로 사임하고, 5일에 임시정부의 베이징 이전이 결정되어 이른바 <혁명시대>는 막을 내렸다.
≪위안스카이의 등장과 혁명의 끝≫
위안스카이에게 정권을 위양(委讓)한 후,
쑨원 등 혁명파의 급진분자는 재야의 입장에서 실업진흥과 사회개혁을 추진하였고, 쑹자오런[宋敎仁(송교인)] 등의 온건분자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다수정당의 수립과 내각책임제의 실현에 힘썼지만,
중화민국 초기의 중앙정국은 정당정치를 둘러싼 항쟁이 전개되어 갔다.
입헌공화제를 원칙으로 한 중화민국의 발족에 따른 정당난립 속에서 쑹자오런 등은 중국동맹회를 개조(改組)하여 공개정당으로 만들고,
소당파(小黨派)를 합쳐 국민당을 만들어 정당정치의 실현을 꾀하였다.
1913년 1∼2월에 실시된 국회선거에서 국민당이 승리하자,
위기감을 느낀 위안스카이는 열강과 입헌파의 지지를 받아 국민당에 무력탄압을 가하고 쑹자오런 암살사건을 일으켜 제2혁명에 성공하였다.
혁명파를 누른 위안스카이는 제제운동(帝制運動)을 추진하는 한편,
일본의 대(對)중국 21개조의 요구를 수락하였기 때문에 제3혁명이 일어났다.
이 혁명은 위안스카이의 죽음과 함께 끝나기는 했으나,
이로 인해 중국은 군벌혼전상태에 빠졌고, 신해혁명은 완전하지 못한 상태로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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